운명의 그날, 송현골 한뼘 거리에 모인 이방원, 정도전, 그리고 이방과

<2회>

1974년 8월 한여름. 성난 한국의 젊은이들이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으로 몰려들었다. 8.15 경축식장에서 대통령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재일교포의 저격으로 서거한 사건에 대해 젊은이들은 일본의 책임을 거세게 물었다. 진압복 차림으로 중무장한 전투경찰들이 이들의 일본대사관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안국동 도로 건너편 송현동 일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이곳에는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직원들의 숙소가 있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농구대가 건너편의 격렬한 충돌현장과 너무나 다른 한가한 모습이었다.

미국대사관의 숙소로 쓰이던 부지는 그 후 몇 차례 주인이 바뀌어 대한항공의 한진그룹이 한옥호텔 건립을 시도했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이 일대는 몇 년 동안 높은 담장이 쳐진 공터로 남겨져 있다.

조선의 개국을 설계한 삼봉 정도전은 1398년 음력 8월25일 밤, 지금은 울타리가 쳐진 이 곳 어딘가에서 죽음을 맞았다. 당시의 송현골이라는 지명이 지금도 송현동으로 남아있다.

안국동사거리에서 본 송현동과 가회동 사이길. /사진=구글지도 거리뷰.
안국동사거리에서 본 송현동과 가회동 사이길. /사진=구글지도 거리뷰.


정도전이 살던 집은 이 곳이 아니다. 그의 집이 있던 종로구청 자리는 이곳에서 직선으로 500 미터가량 남쪽에 있다.

그 무렵 그는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송현골 남은의 첩 집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다. 8월25일 밤, 정안군 이방원의 반군이 들이닥치자 그는 긴급히 담장을 넘어 바로 옆에 있는 민부의 집으로 숨어들었으나 이내 발각돼 처형됐다.

정도전이 집을 놔두고 며칠 째 남은의 첩 집에 머물렀던 것은 임금인 이성계의 승하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왕조를 세우고 처음으로 맞게 되는 왕위승계였다. 세자인 방석은 이복형인 영안군 방과(정종), 정안군 방원(태종)에 비해 아직 너무나 어렸다. 사실상 섭정의 권한을 행사하게 될 정도전이 빈틈없이 권력승계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의 승하 소식이 나기가 무섭게 제일 먼저 입궐해서 궁 안팎의 모든 상황을 장악해야 했다. 임금이 승하하기 전에 후사를 부탁한다는 고명대신의 지위를 공인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직선거리 500미터라고 하지만 이것은 지도위의 직선거리일 뿐이다. 정도(定都) 초기 한양 곳곳은 도심이라 해도 곳곳에 언덕과 숲이 이동시간을 늘리고 있었을 터이다. 정도전은 언제든지 신속하게 입궁할 차비를 갖추기 위해 송현에 비상대기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왕의 승하 때, 정도전이 촌각을 다퉈서 입궁하려고 한 또 다른 요인도 있다. 명분상으로 세자 방석의 최대 숙적이 되는 영안군 이방과, 즉 방원의 둘째형이며 생존해 있는 제일 큰 형의 이무렵 행적이다.

당시 영안군은 부왕의 쾌차를 위해 소격전에서 재계를 드리고 있었다. 소격전은 조선시대 도교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역사에서 흔히 전하는 영안군의 사심 없고 착한 심성과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총책임자 정도전은 이 또한 순수하게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영안군이 재계를 하고 있다는 소격전이 바로 경복궁의 코앞, 동문인 건춘문 바로 건너편에 있기 때문이었다.

소격전이 있었던 사실로 인해 그 동네를 지금도 소격동으로 부르고 있다. 정도전이 며칠째 외박을 하고 있는 송현골과 방과가 기도를 드리고 있는 소격동이 남북으로 맞붙어 경복궁에서 어디가 더 가깝나를 경쟁하는 형국이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던 밤, 이방과와 이방원 정도전의 위치.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던 밤, 이방과와 이방원 정도전의 위치.


정도전 입장에서 영안군은 왕의 착하기만 한 제일 큰 아들이 아닌 위험천만한 권력경쟁자였다.

특히 방과는 이성계 아들들 가운데 유일하게 부왕의 대소전투에 거의 대부분 종군했다.

만약 이방과가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 입궐한다면 그 옛날 그와 함께 전쟁터에 나섰던 왕궁의 장병들은 일순간에 그에게 충성맹세를 하게 될 일이었다. 익안군(방의) 회안군(방간) 정안군 등 그의 동복동생들과는 차원이 다른 난적중의 난적이었다. 영안군이 소격전을 찾아 간절히 부왕의 쾌차를 빌수록 그런 행동이 정도전의 눈에는 왕의 유고 때 서둘러 입궐하기 위한 사전준비로 보였다.

정도전은 이곳에 머무는 매일 밤 남은 심효생과 함께 임금이 승하하더라도 소격전 방과의 귀에는 최대한 늦게 들어가도록 해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하는 도상훈련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신경을 온통 영안군에 집중함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그의 동복아우 방원에 대한 경계가 소홀해졌다. 둘째 형 방과는 본인의 의도한 바가 아닌데도 동생 방원의 거사성공에 엄청난 기여를 했던 것이다.

곧 죽을 것 같던 왕이지만 타고난 강인한 체질로 인해 정도전이 송현에서 식객처럼 지내는 날이 한없이 길어졌다. 이젠 체력이 고갈돼 왕보다 정도전 일행이 먼저 쓰러질 지경이었다.

이성계는 과연 하늘이 내린 민족의 영웅이었던 듯하다. 마침내 조금씩 기력을 회복해 곧 일어나실 듯 하다는 어의의 진단이 정도전 일행에게 전해졌다. 이곳에서의 비상대기도 이날로 끝내고 내일부터는 다시 아늑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세자의 등극을 기다리며 한껏 부풀었던 가슴을 가라앉히고 평상의 심정으로 돌아가기 위한 한담을 정도전은 남은 등과 밤새 나눴다. 집 안팎에 대한 경계도 완전히 느슨해져 은밀히 진격한 방원의 수하들이 집에 들어와 이런 사정을 염탐하는 것도 전혀 몰랐다.

왕에 대한 의료정보는 오로지 정도전 일행의 수중에만 있었다. 방과와 방원 형제는 까맣게 모르고 그저 부왕이 오늘 당장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1398년 무인년 이날을 정도전 최후의 날로 만들었다. 부왕이 더 이상 살아날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이 마침내 이날 거사를 일으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왕이 이미 승하했거나 의식이 없을 것으로 여긴 이방원은 나중에 아버지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일으킨 반란 수습을 직접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엄청난 당혹감에 빠졌을 것이다.

정도전이 일당들을 모아 며칠째 송현골에서 먹고 잔다는 소식은 그다지 비밀도 아니었다.

이방원부터 이날의 최초 공격목표로 남은의 첩 집을 정해놓고 있었다. 또한 이 집으로 최초의 화살세례가 쏟아지자마자 대궐 안에서 이 장면을 보게 된 친위대 지휘관 박위는 바로 피리를 불러 한양 시내에 머물고 있는 모든 궁궐 장수들에게 비상소집을 발동했다.

박위의 군사들이 피리를 불자 도승지 이문화가 “이제 전하께서 거처를 피하여 옮기시오? 어찌하여 피리를 부시오?”라고 물었다. 박위는 “어찌 전하께서 거처를 옮기시겠소? 봉화백(정도전)과 의성군(남은)이 모인 곳에 많은 군마가 둘러싸고 화광이 가득하니 피리를 부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궁 안팎모두 정도전이 이 밤 송현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방원의 무인정사는 극히 짧은 시간에 모든 군사충돌이 끝났다.

소수의 병력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세력의 정석대로 방원은 정권의 최고수뇌부 정도전을 바로 겨냥했다. 당태종의 현무문 정변처럼 세자가 권력의 핵심이라면 세자를 바로 공격해야 했겠지만, 방석은 아직 정도전이 없으면 무방비 상태의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방석이 이미 세손을 낳을 정도로 장성하긴 했지만 귀하게만 자란 그에게 군사를 부리고 정국을 이끌어갈 경륜은 전무했다. 그래서 이 시간 정도전이 머무는 송현이 모든 군사작전의 핵심목표가 됐다. 순식간의 급습에 정도전이 사로잡혔다. 은밀한 군사작전은 여기까지였다. 양측의 무력충돌도 여기까지였다.

정안군 이방원은 기습공격으로 정도전을 살해한 후 가회방 동구로 나와 드디어 진세를 펼치고 기세를 올리며 이곳으로 부름을 받은 재상들을 맞이했다. 가회동과 송현동 사잇길에서 안국동사거리를 본 모습.
정안군 이방원은 기습공격으로 정도전을 살해한 후 가회방 동구로 나와 드디어 진세를 펼치고 기세를 올리며 이곳으로 부름을 받은 재상들을 맞이했다. 가회동과 송현동 사잇길에서 안국동사거리를 본 모습.

 

이미 대궐에서도 송현골의 거병을 포착하고 피리를 불며 장수들을 소집했다. 방원의 병력은 비교도 안 되게 열세였지만, 제1단계 작전이 완벽하게 성공해 바로 그 자리에서 정도전 없는 세상을 만들었다.

과연 누가 정도전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 일을 방원이 해냈다. 칼 휘두를 수 있는 조선의 모든 장수들에게 정안군 이방원이 부왕 이성계를 대신하는 새로운 시대의 주역임을 각인시키는 순간이 됐다.

이 카리스마가 겨우 수 백 명의 군대를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뒤덮은 백만대군으로 보이게 만드는 조화까지 이끌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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