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삼군부 공격부터 했다면 실패한 거사가 됐을 것

<3회>

조선 태종대왕의 제1차 왕자의 난, 즉 무인정사가 정통사극에서 다뤄진 것은 1983년 MBC ‘조선왕조500년’ ‘추동궁마마’, 1997년 KBS ‘용의 눈물’, 2014년 KBS ‘정도전’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태종이 될 정안군 이방원이 먼저 삼군부에서 격전을 치러 삼군부를 접수하고 조정을 장악한 후 다음날 해가 뜰 때가 돼서야 정도전을 붙잡아 처형한다. ‘정도전’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흐름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소수의 병력으로 거병하는 세력이 성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조정의 핵심수뇌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용맹무쌍하게 싸워도 정부군의 수뇌부가 건재하다면, 몇백배나 더 많은 진압군의 조직적인 반격에 끝내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선은 권력의 핵심을 제거하고 막강한 정규군의 지휘체계를 무너뜨려야만 한다. 민심장악은 거사 성공후 고민할 일이다. 이것은 ‘반란의 교본’이나 마찬가지인 철칙이다. 당연히 무인정사에서 최초 공격대상은 정도전이어야만 했고 실제로 이방원은 정도전이 머물던 송현 남은의 첩 집을 공격해 이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무인정사를 교본으로 삼았을 것이 분명한 수양대군의 계유반란이 실질적 병권을 지닌 김종서부터 공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태종대왕의 롤모델인 당태종 이세민의 현무문 정변에서도 이세민은 친형이자 적의 최고 우두머리인 태자 건성에 대한 공격으로 거사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드라마들은 왜 삼군부에서의 교전을 먼저 다뤘을까. 이것은 태조실록의 이날 기사가 사건흐름과 별개로 삼군부 앞에서의 상황을 먼저 서술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KBS의 2014년 드라마 ‘정도전’은 역대 최고의 완성도로 평가할만한 정통사극이다. 이 드라마에서도 ‘제1차 왕자의 난’이 삼군부 공격으로 시작된 것으로 묘사됐지만 이는 사실과는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소수 반군은 정부군의 핵심수뇌부부터 바로 공격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이런 각색은 조선왕조실록의 문장 순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KBS 드라마 유튜브 화면캡쳐.
KBS의 2014년 드라마 ‘정도전’은 역대 최고의 완성도로 평가할만한 정통사극이다. 이 드라마에서도 ‘제1차 왕자의 난’이 삼군부 공격으로 시작된 것으로 묘사됐지만 이는 사실과는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소수 반군은 정부군의 핵심수뇌부부터 바로 공격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이런 각색은 조선왕조실록의 문장 순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KBS 드라마 유튜브 화면캡쳐.

 

드라마에서는 왜 삼군부 공격을 맨 처음으로 각색했나

태조7년(1398년) 음력 8월26일자 기사에서 두 번째로 경복궁을 벗어난 이방원은 이숙번, 셋째형 익안군, 넷째형 회안군, 상당군,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서익, 문빈, 심귀령과 처남 민무질, 민무구와 합세했다. 이들이 거느린 군사는 기병 10여명과 보졸 9명에 불과했다.

실록은 8월26일자에 무인정사를 기록했지만 정확한 날짜는 8월25일이다. 이는 세종 20년 9월25일 태종릉 헌릉의 비문을 고치는 실록 기사에서 태종을 모셨던 전흥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다. 이 기사에도 당시의 현장을 겪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이 등장한다. 태조실록을 만든 사관은 8월25일과 26일 양일에 걸친 상황을 모두 모아 26일자에 기록했던 것이다.

태조7년 기사는 태종의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사건의 순서가 다소 얽힌 점이 있지만 세종 20년 기사에는 태종의 측근이었던 전흥이 일의 순서에 따라 차분하게 당시의 정황을 증언하고 있다.

조선조정은 태종의 거사에 대해 정도전 등이 먼저 왕자들을 살해하는 역모를 도모해 이를 물리치기 위해 거병한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역모를 물리치기 위해 다급하게 세를 규합한 것이어서 반군의 군세가 대단히 초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은 이날의 명분에 대해 대단히 예민한 모습을 보인다. 태종이 미리 거사를 준비했다는 주장은 그를 역적으로 몰아가는 불순한 주장이 되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세종 20년의 실록 기사에 따르면, 찬성 벼슬의 신개가 태종릉 헌릉의 비문에 ‘태종께서 병기(炳幾)하시어 적도를 섬멸 제거하셨다’는 표현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뿌리도 잡지 않고 싹도 트지 않은 일을 감행하고서 이를 교묘하게 꾸며대는 것도 역시 ‘병기’라고 이르는 수가 있습니다”라며 “우리 태종께서 광명정대하옵기가 저 청천백일과 같으셨는데, 이 말이 혹시 후세에 의혹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옵니다”라며 수정을 주장했다.

왕통의 정통성에 직결되는 문제기 때문에 세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세종은 실록내용을 살펴본 후 이때 이미 죄인이 돼 있던 이숙번까지 일시적으로 불러들여 이를 고치는 작업을 지시했다.

태조실록을 만든 태종조의 사관은 무인정사가 절대로 태종이 미리 계획한 반란이 아닌 정당방위였음을 확실하게 강조하려고 했다. 사관은 그 근거로 반군의 군세가 대단히 초라함을 활용했다. 태종 이방원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삼군부 앞의 초라한 군세를 사건 흐름과 별개로 미리 언급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옥집들이 지금도 송현동에 남아있다.
한옥집들이 지금도 송현동에 남아있다.

 

아무리 천명을 받은 태종 이방원이라 해도 10여명의 장수에 10여명의 기병, 9명의 보졸로 어떻게 거사를 성공할 수 있었을까. 실록은 여기에 약간의 단서를 덧붙이고 있다. 이날 모인 장수들이 저마다 10여명의 노복을 거느리고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100~200여명의 병력은 구성했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실록은 이들 노복이 모두 몽둥이만 가져서 절대로 제대로 갖춰진 군대가 아니라는 점을 또 한 번 강조한다.

실록의 사관은 병력이 허술한 이방원의 성공이 천명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용비어천가 98장에 소개될 사연을 앞당겨서 기사의 서두에 언급한다.

“정안군이 산성이란 두 글자로써 군호를 명하고 삼군부(지금의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자리. 광화문 바로 길 건너편)의 문 앞에 이르러 천명을 기다리었다. 방석 등이 변고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싸우고자 하여, 군사 예빈소경 봉원량을 시켜 궁의 남문에 올라가서 군사의 많고 적은 것을 엿보게 했는데, 광화문으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정예한 기병이 꽉 찼으므로 방석 등이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으니, 그때 사람들이 신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이런 서술이 이방원의 송현 공격보다 먼저 나오는 바람에 마치 삼군부에 먼저 군세를 펼친 것같은 오해를 낳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관이 섬기는 임금 태종이 천명을 받았음을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도치법이다.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실록의 이 부분은 용비어천가 98장에 그대로 수록된다. 용비어천가는 조선의 개국 6조(朝)가 천명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일화들을 중국 성군들의 비슷한 사례와 함께 비교하면서 노래하는 내용이다.

성공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일이지만 우리 태종대왕은 천명을 받으셔서 이를 성공했다. 이것이 조선조정의 무인정사에 대한 공식입장이다.

그러나 정안군 이방원이 이날 거사에 성공한 진정한 이유는 그가 천명을 받은 사실에 교만하지 않고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고 물러나고 나아감의 최적의 시기를 잘 포착해 천명이 내려질 수 있도록 충분한 준비를 갖췄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태조실록의 해당 기사 역시 계속 읽어내려가다보면 이방원의 송현 공격이 최초 발생상황임을 밝히고 있다. 대궐 수비장수 박위가 송현에서의 전투 장면을 보고 그제서야 비상상황이 발생한 것을 알고 피리를 불며 퇴근한 장수들을 호출했다고 전한다.

따라서 삼군부 앞에서의 대치가 먼저 서술된 것은 사관이 사건 순서와 무관하게 태종의 천명을 먼저 강조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상식적으로도 만약 이방원이 정도전을 마주치기도 전에 그의 군사행동이 조정에 포착됐다면 그는 바로 공격을 받고 허술한 군세가 와해돼 운이 좋아봐야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을 것이다.

삼군부 앞의 진출을 먼저 언급한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 송현으로 이르는 자연경로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은 군세를 떨치지 않은 은밀한 이동이지만 이미 삼군부와 광화문이 시야에 들어왔다면 목표지점인 송현 또한 같은 시야에 있는, 말하자면 공격개시 직전의 상황을 언급한 것이기도 하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경복궁 주변 형세. /지도=구글맵.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경복궁 주변 형세. /지도=구글맵.


세종 20년, 전흥이 전한 태종의 이날을 전후한 행적은 다음과 같다.

“신 흥이 태종의 도진무가 되어 항상 태종을 수종하였사온데, 태종께서 때로는 익안·회안·상당 등 여러 군들과 더불어 어두운 골방에서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하셨는데, 신은 속으로 무슨 일이 있는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사실 이 발언은 태종의 명백한 반란이었음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흥은 말을 이어갔다.

“8월 25일 저녁에 태종께서 감순(순찰)을 끝마치고 궐내로 나아가서 직소(숙직실)로 들어가시니, 익안·회안·상당 등의 여러 군들이 이미 먼저 나아가 있었는데, 때는 아직 인정의 종이 울리지 않았었습니다. 태종께서 신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너는 감순청으로 돌아가서 순관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중관이 나와서 말하기를, ‘성상께서 병환이 위독하시니, 여러 왕자들은 급히 입궁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형님들은 먼저 들어가 보시지요. 나는 복통이 나서 변소에 갔다가 온 뒤에 곧 들어가겠습니다’ 하시고, 즉시 몰래 빠져 나와 본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만필자는 정황상 이날 태조 이성계가 드디어 회복해 일어나려는 조짐을 보여 정도전 등이 송현에서의 식객생활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태조가 위독해서 불러들였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회복해서 ‘이제 걱정을 놓고 다들 돌아가라’고 이르기 위함이었거나 아니면 불러들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전흥 역시 태종의 측근인 이상, 정도전이 왕의 위독함을 핑계로 왕자들을 내궁으로 불러들여 살해하려 했다는 이방원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모습이다.
 

태조7년보다 더 정확히 당시를 전하는 세종20년의 실록기사

전흥의 이어지는 증언이다.

“신이 감순청에 있으려니까 초경(저녁 7~9시)이 이미 다하였는데, 태종께서 10여 인의 기병을 거느리시고 광화문을 지나시기에, 신이 감순청에서 나와 말 앞에서 뵙고 말씀드리기를, ‘신도 따를까요’ 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곳에 있으면서 행순하는 것을 살피라’고 하셨습니다”.

태조7년 기사에서 이경(저녁 9~11시)에 이르러 이숙번이 이방원에게 “이것이 소동이니 곧 남은 첩의 집입니다”라고 한 것과 일치되는 증언이다.

전흥의 얘기에서는 이때까지 한양 시내에서 아무런 소요사태도 없었다.

그가 이어서 말한다.

“태종께서는 동문(송현은 건춘문 건너편에 있다)밖 남은의 첩 집에 이르시와, 그 이웃집에 불을 지르시어, 밝기가 마치 대낮과 같았으며, 정도전·심효생 등을 목 베이셨는데. 이무가 나오며 말하기를, ‘나는 이무란 사람이요.’ 하니, 명하시어 놓아주셨습니다.”

기습작전으로 정도전부터 제거했음을 전흥이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태조 7년 기사에서는 정도전이 반란군의 접근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방심하고 있는 정황을 그대로 전한다. 이 내용은 정도전이 먼저 왕자들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지만 실록에 그대로 담겼다.

이방원의 측근 소근(성명미상의 인물로 ‘작은’이란 뜻을 가진 음차와 훈차 합성용어)이 10여명의 보졸과 함께 집을 포위했다. 안장 갖춘 말 두서너 필이 문 밖에 있고 노복은 모두 잠들었는데, 정도전과 남은 등은 등불을 밝히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정황을 모두 살펴봤다. 그만큼 정도전의 모습은 왕자들 살해결과를 기다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근이 들어가지는 않고 지게문을 엿보고 있는데 갑자기 화살 세 개가 잇달아 지붕 기와에 떨어져서 소리가 났다. 드디어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미처 몰랐던 소근이 깜짝 놀라 동구로 나오자 이숙번이 “내가 쏜 화살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송현 일대가 화광이 충천하게 되고 고요하던 한양 시내가 갑작스런 전투상황에 휩싸이게 된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격전이 벌어졌던 송현동의 오늘날 밤거리.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격전이 벌어졌던 송현동의 오늘날 밤거리.

 

이날의 실록기사에서는 대궐수비장수 박위가 이 때에 이르러 정도전이 이 시간 머무는 곳에서 난리가 났음을 알아채고 피리를 불며 퇴근한 장수들에게 비상소집 조치를 발동했다.

도승지 이문화가 “임금께서 거처를 옮기시오?”라며 피리를 부는 까닭을 묻자 박위는 “어찌 임금이 거처를 피하여 옮긴다고 하겠는가? 봉화백(정도전)과 의성군(남은)의 모인 곳에 많은 군마가 포위하고 불을 지른 까닭으로 피리를 분 것뿐이다”고 말했다.

박위의 대답으로 보면 그는 이때까지도 반란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여기는 기색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박위는 명백하게 이방원의 거사를 진압하는 행위를 시작하게 됐다.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흥미를 주기 위해 많은 전투장면이 필요하다. 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진 당일의 군사충돌은 지극히 짧게 끝이 났다.

기습을 받은 정도전은 담장을 넘어 이웃집으로 숨어들어갔지만 곧 붙잡혀 이방원에게 바로 처형됐다. 전투를 최소한에 그치게 할 수 있었다는 점도 거사가 성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조선팔도에 30만에 이르는 상비군의 최고지휘부는 이렇게 무력화됐다. 이방원의 거사는 시작과 함께 성공의 절반 이상, 어쩌면 8할 이상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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