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비극으로 통치자신감 얻은 전두환, 학원자율화 조치로

‘586’도 다 같은 586이 아니다. 4년의 대학생활, 캠퍼스 어딘가 가까운 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늘 숨어있는 그런 대학을 다닌 세대가 있는 반면, 군사독재자의 폭압정치를 단 하루도 겪어보지 않은 세대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모두 묶어 ‘586세대’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지금은 90년대 중반학번까지 586까지 부르는 경향이 있지만 만약 이 단어가 군사독재에 저항한 시대의 대학생을 일컫는 말이라면 만필자는 586세대의 범위를 86학번까지로 좁혀야 한다고 본다. 정확히 1986년까지다. 바로 1년 아래 87학번부터는 성향부터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이미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 세상에서 대학에 들어와 전혀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의 586세대도 83학번 이전과 84~86학번의 성향이 크게 구분된다. 1984년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이른바 ‘학원자율화’조치를 시작했다. 박정희 유신정권보다도 훨씬 더 살인적인 폭압정권의 본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학공기의 ‘맛’자체는 크게 달라졌다. 일단은 곳곳에 검은 얼굴을 드러내고 있던 ‘죽음의 전령들’이 색깔 있는 위장복을 입고 자신을 감춘 시기가 됐던 것이다.

독재정권의 꿍꿍이가 숨겨져 있던 정책이지만, 이것이 신입생들의 기를 크게 살려주는 효과는 있었다. 그래서 당시 대학사회에서 대체적으로 84학번들이 선배들에 비해 거침없이 자기주장을 펴고 유쾌한 놀이를 많이 한다고들 얘기했다.

사진=KTV 유튜브 화면캡쳐.
사진=KTV 유튜브 화면캡쳐.

 

1984년 입학생인 만필자는 학원자율화 이전의 대학을 겪어보지는 못했다. 다만 중학생이던 1980년 등하굣길에 연세대학교 운동장에 병영이 들어서고 군용트럭들이 가득 찼던 장면을 몇 달 동안 봤던 기억을 갖고 있다.

84학번들에게 선배들이 어떻게 대학을 다녔는지를 알려주는 사태가 입학 초에 있었다. 강제징집 6명 학우들 추모시위였다. 전두환 정권이 반정부투쟁하던 학생들을 체포한지 하루 만에 강제입대시켰고 이들이 제대를 앞두고 자살했다.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은 좀 더 세월이 흘러 민주화가 이뤄진 뒤에 밝혔다. 이른바 ‘녹화사업’이라는 반인륜적 범죄였다. 입대한 학생들을 협박해 다른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강취했고 이들은 협박에 의한 것이지만 제대가 가까워질수록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커져 마침내 극단적 선택을 했던 것이다.

1983년 이전에는 학교 안에 아예 공안경찰이 상주해서 교내시위가 벌어질 조짐만 보여도 바로 진압되고 시위학생들이 체포됐다고 한다. 성균관대학교 총장을 지낸 심윤종 사회학과 교수는 “시위가 벌어지면 교수실 벨이 울려서 교수들이 모두 나와서 학생들을 말려야 했는데 벨소리를 듣고 나오는 교수들을 학생들이 ‘바보들의 행진’으로 불렀다”는 당시 경험을 수업 중 밝힌 적이 있다. 경찰이 서클(동아리)룸을 뒤져서 마음에 안 드는 책 한권만 찾아내도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엮어서 끌고 가 재판도 받기 전에 사람을 반죽음 만드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랬던 전두환 정권이 84학번의 입학을 앞두고 ‘자율화정책’이란 선물을 선사했던 것이다. 명목상으로나마 모든 경찰인력이 교내에서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지만 어떻든 최선봉에서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는 학생도 학교 안에만 머물러있으면 경찰에 체포될 일이 없는 변화가 찾아왔다. 5공화국 법의 테두리 내에서 대학이 ‘해방공간’을 얻어낸 것이었다. 학생들의 가두시위 진압도 교문 밖에서만 이뤄졌다.

만필자가 입학한지 한 달 쯤 지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다. 교황이 학교 근처에서 주요 일정을 갖고 있어서 명륜동 길을 지나갈 때 교내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전투경찰은 교문에서 한 발자국도 안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교황이 지나가기 전에는 최루탄 한발도 쏘지 않았다. 교문사이에 방패를 나란히 붙이면서 거리로 나서려는 학생들과 힘겨루기만 지속했다. 이런 모습은 1년 전에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독재통치 기술 가운데는 한번 풀어줬던 자유를 수시로 다시 거둬갈 것을 협박하면서 위력정치를 해나가는 것이다. 3월에 시작된 자율화조치가 10월에 큰 고비를 맞았다. 서울대생들의 중간고사 거부시위가 대단한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독재정권은 중간고사 거부가 더욱 큰 시국사건이 되는 것을 차단하려고 나섰다. 마침내 서울대 한 학교에 40대 중대 6000 명의 전투경찰을 투입해 교내에서 일체의 시위를 막았다. 서울대에 다니던 선배 얘기로는 그 와중에도 시위가 벌어지긴 했는데 경찰대열이 워낙 촘촘해 시위대가 형성될 공간 자체가 없었다고 한다.

군사폭압통치의 본질은 바뀐 것이 없었지만, 84학번들은 담론의 자유가 훨씬 커진 대학에 들어와 자기주장만큼은 마음껏 펼 수 있었다. 이들과 달리 살벌했던 이전 시기를 겪은 선배들이 잠재의식 어딘가에 여전히 조심스러움을 남겨뒀다.

한국 정치에서 50대는 2012년 대통령선거 때까지 오로지 ‘보수’ 성향으로만 분류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의 원인이 50대 몰표로 분류되기도 했다. 이랬던 50대의 정치성향이 지금은 전혀 달라졌다. 이런 변화가 생긴 시기는 대체적으로 84학번들이 50대가 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스무 살 되던 해 이같은 ‘자유’를 선물한 전두환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것은 전두환의 통치에 대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 자신감은 입학 한해전인 1983년 벌어졌던 엄청난 비극들의 여파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 비극이 이어진 1983년

냉전시대 공산권의 맹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82년 사망하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뒤를 이었다. 안드로포프는 미국의 부활을 강하게 밀어붙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 강대강으로 맞섰다. 1983년 초부터 동해상에 소련 공군기가 자주 나타나 한국 공군기가 바로 옆에 따라붙어 이를 감시하는 사진이 일간지에 실렸다.

갈수록 고조되던 냉전의 긴장은 마침내 엄청난 비극을 가져왔다. 그해 9월1일 소련 공군기가 대한항공의 민항기를 격추시켜 269명의 승객이 모두 사망했다. 한국 전체가 엄청난 비탄과 분노에 덮였다.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달 후 한국 대통령 전두환의 방문이 예정된 버마(미얀마) 아웅산 장군 묘소에서 북한공작원의 폭탄테러로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등 17명의 한국인이 순국했다. 테러의 표적이었던 전두환은 갑작스런 일정변경 덕택에 죽음을 면했지만 출중한 고위 관료들을 잃은 한국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공산권으로부터 연이은 잔인무도한 공격이 가해지면서 국내의 민주화투쟁에 일시적으로 제동이 걸렸다. 전두환으로서는 비극의 여파로 국내통치에 관한한 큰 자신감을 갖게 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개최를 앞두고 한국의 병영사회 같은 모습을 일부 완화시킬 필요도 있던 마당에 정치적 반대세력들도 크게 위축된 가운데 1984년을 맞이했다. 전두환은 3월 학원자율화조치뿐만 아니라 11월에는 집권 때 실시했던 정치규제에 대한 2차 해제를 실시했다. 다음해 2월에는 총선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아웅산에서 순국한 선열들을 이용해 또 다른 죄를 저질러 스스로 운수를 더욱 험난하게 만들었다. 그의 버마 방문에 동행했던 경제인들은 순국자들의 유족을 위한 기금조성을 건의했다. 전두환이 이를 수락해 일해재단이 만들어졌다. 바로 이 기관을 유족지원이라는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퇴임 후 영구집권 기구로 만들려고 하다 심각한 비리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가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여소야대가 된 국회는 전두환의 3대죄악을 추궁했다. 일해재단 비리가 핵심을 차지하는 5공비리, 광주항쟁, 언론통폐합에 대한 세 개의 국회특별위원회와 청문회가 열렸고 전두환은 국민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백담사 유폐 생활을 자처하게 됐다.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들은 집단 교련거부로 병역혜택 포기도

84학번들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자기주장이 강하고 행동이 앞서는 성향을 보였다. 그것이 서울대 경제학과 84학번들의 교련거부로도 이어졌다.

5공시대에 교련은 대학교 1, 2학년의 교양필수과목이었다. 졸업을 위해 반드시 이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재학 중 입영연기를 위해서도 제때 수강해야 했다. 학점을 이수하지 못하거나 교련 거부자가 되면 대학재학 중의 입영연기 혜택이 사라졌다.

1학년2학기, 경찰병력이 6000명이나 교내에 들어오는 사태 와중에 서울대 경제학과 가운데 한 반 전체가 교련을 거부하는 일이 있었다. 학교당국은 끝내 이들을 구제하지 않았다. 서슬 퍼런 5공 시대에 교직원들이 교련거부를 구제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사자들 경험을 들어보면 재학 중 징집되는 일은 면한듯한데 다른 병역혜택은 받지 못했다. 당시엔 6개월 복무 석사장교 제도 등이 있어서 서울대생이라면 학업을 계속할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이런 제도를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단으로 교련거부자가 된 경제학과 학생들은 예외였다. 그래서 서울대 경제학과 84학번은 학력으로 보나, 업무 능력으로 보나 또래의 석사장교들하고 같이 병역을 마쳤거니 싶은데 알고보면 병장 또는 상병제대를 한 사람들이 많다.

5공정권은 경찰이 정복을 입고 교문안으로 안들어가고 학도호국단을 총학생회로 바꾸는 정도의 학원자율화 정책을 펴면서도 KBS 등을 통해 다각도로 대학생 성향을 통제하려고 들었다. 3월 신학기를 앞두고 올바른 학생은 시위에 관심두지 않고 면학에만 열중한다는 그 당시 KBS의 상투적 구호를 담은 특별드라마를 제작하는가 하면 신학기 개학 직후에는 느닷없이 몇년 전 납북된 배우 최은희의 근황 정보를 사진과 함께 공개해 반공분위기를 통한 민심통제에 부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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