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월드컵 등장한 그 노래와 함께 9일 안장식 마무리

폭압적 군사독재에서 민주사회로의 격변기인 1988~1993년엔 매달, 아니 매주단위로 굵직굵직한 뉴스들이 터져 나왔다. 88서울올림픽, 사상 최초 여소야대 국회, 5공비리와 광주항쟁 청문회, 전두환 백담사 낙향, 현대그룹 ‘왕회장’ 정주영의 대통령선거 출마, 대학생들의 남북평화 촉구와 임수경의 방북, 1991년 연이은 시위학생 사망과 자살 등 하나같이 일주일은 신문톱을 장식할 뉴스들이 이어졌다.

이런 뉴스들에 비하면 1992년 김달현 북한 부총리의 한국방문은 지금에 이르러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김달현 방남은 눈에 띄지 않게 엄청난 흡인력을 과시했다. 특히 북한출신 실향민들에게 그랬다.

우리 아버지는 실향이산가족으로 초강경한 반공이념으로 평생을 일관해 모든 남북평화 뉴스를 냉소적으로 대하셨지만 단 하나 예외가 이 때의 김달현 뉴스였다. 그의 방남 열흘 동안만큼은 할머니, 즉 아버지의 어머니와 스무살에 생이별한지 40여년 만에 참으로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하셨다. 뉴스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매일 9시 전에 뛰어 들어오다 시피하며 귀가하셨다.

6하원칙에 따른 ‘팩트’만으로는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은 김달현 뉴스였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 5년이 어떤 의미인가를 헤아리는 모든 설명들이 이 뉴스에 담겨있다. 세월이 지날수록 김달현을 맞이했던 한국사회의 모습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이 김달현 북한 부총리(노 대통령 왼쪽)의 예방을 받고 그의 수행원들을 소개받고 있다. /사진=KTV 유튜브 화면캡쳐.
1992년 노태우 대통령이 김달현 북한 부총리(노 대통령 왼쪽)의 예방을 받고 그의 수행원들을 소개받고 있다. /사진=KTV 유튜브 화면캡쳐.


김달현 방문에 들뜬 실향민들은 오늘날 한반도 평화정책이 조금만 삐끗해도 여론의 역풍을 맞는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스포츠에서도 그랬다. 탁구의 현정화와 이분희가 단일팀을 이뤄 중국을 물리치고 세계선수권을 우승했다. 축구에서도 모처럼 남북이 세계청소년대회 출전권을 딴 마당에 아예 단일팀을 이뤄 함께 출전했다.

지금처럼 단일팀 때문에 억울하게 대표팀 탈락하는 선수가 나온다는 비난도 없었다. 당사자인 선수들부터 ‘단일팀’이라는 대의와 그에 따른 희생을 수용했다. 절반의 동료가 탈락하고 만든 단일팀이지만 선수들은 ‘민족의 케미’를 완성했다. 조별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격파하는 기적의 승전보를 전하며 8강에 진출했다. 1991 탁구와 청소년축구는 지금도 여전한 남북단일팀의 신화가 됐다.

노태우 시대, 통일을 대하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이와 같았다. 정치적으로 보수, 심지어 극우라고 평을 받는 사람들까지 민족의 대의를 위해 억울함을 감수하는 사람들을 다독거리고 북한사람들과 머리를 맞대며 진지한 의논을 이어갔다.

이 당시 남북화해노력을 국민들이 전적으로 지지한 것은 물론 아직 ‘남북평화’ 정책에 대한 피로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통일정책 담당자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분명히 있다. 당장의 성과과시에만 몰두해 현실보다 앞서나감으로써 국민들의 반감을 초래하는 일은 없었다는 점이다. 1988년 올림픽 직전, 남북 학생대화를 요구하며 판문점 가는 길에 드러눕던 대학생들을 강경진압하며 해산시키던 정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남북한 평화노력이 꾸준하게 정책에 담겨나갔다.

올해 비슷한 시기에 유명을 달리한 노태우와 전두환, 두 사람을 떠나보내는 한국사회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다. 노태우는 12.12 반란의 주동자라는 점은 전두환과 같지만 5.18 민중학살에 있어서는 상당한 거리를 뒀다. 두 사람이 법의 심판대에 선 1995년 1심 판결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으로 판결이 엇갈린 주된 이유다. 노태우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지고 그와의 ‘영결’이 전두환에 비해 한결 편한 이유이기도 하다. 9일의 ‘고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안장식’에는 1980년 5.18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이었던 박남선씨도 참석해 조의를 표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고 묻어두는 점에서 단연 최강인 인물이었다. 이것이 박정희보다도 더 가혹한 독재자 전두환의 8년 집권 내내 살얼음판의 2인자 자리를 지켜낸 원동력일 것이다.

이런 모습은 1989년 육사졸업식 교장의 항명훈시 소동에서도 살짝 엿보인다. 이 졸업식에서 당시 교장인 민병돈 중장이 10분간에 걸쳐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을 비난했다. 한해 전 박희도 육군참모총장의 전역식 발언과 함께 전두환의 ‘하나회’ 인사들이 대놓고 민주화 흐름에 반발한 대표적 사례였다. 예법과 분수에 모두 어긋난 발언을 내내 듣고 있던 노 대통령이 자리로 돌아오는 민 교장에게 건넨 첫마디는 “민 교장, 경례받아야지!” 라는 일침이었다.

대통령 면전에서 항명하는 ‘멘탈 폭등’으로 인해 스스로 당황한 민 교장이 생도들의 경례받는 것조차 잊고 자리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일간지에 담긴 정황이다.

‘586세대’인 만필자에게 노태우 시대는 복학 후 대학원까지 다닌 시기다. 우리나라의 조속한 변화에 대한 기대가 커진 만큼 변화이슈가 나올 때마다 발목 잡는 사람들이 전두환보다도 더 혐오스럽게 보이는 ‘착시’도 겪던 시절이다.

군인들이 직접 총칼로 위협하던 것을 기성체제의 자율로 단속하게 되니 전경련 회장이 나서서 “어느 당에는 좌파의원이 12명이나 있다. 이런 당에는 정치자금을 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발언까지 내놓았다. 예전에는 아무 소리도 않던 사람들이 곳곳에서 이렇듯 반발하자 이게 무슨 민주화냐는 재반격 역시 전혀 시들지 않았다.

1992년,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이 맞붙은 대통령선거에서 앞선 5년 동안 한국이 달라진 점 하나는 뚜렷해졌다. ‘야당의 아무개가 당선된다면 군인들이 가만 안 있을 것’이란 얘기는 이제 사람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는 점이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그런 것도 변화냐고 하겠지만 1990년대를 들어서던 한국에서는 아직 장담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9일 파주 동화경모공원에서 거행된 안장식에서 노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이사장은 상주인사말에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너무나 많은 분들이 도움과 용기를 주셨다”며 이날 참석한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 등에게 사례했다. 노 이사장은 “아버지 생애 굴곡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지지하든 안하든 국민들이 자부심을 가지는 나라를 만들어갔다”며 “아버지는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함께 이뤄 나간 것이 무한한 영광이고 행운이었다’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전했다. 그는 “아버지가 이룩한 일들을 계승해 나가는 것이 뒤를 이은 사람들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9일 경기도 파주 동화경모공원에서 ‘고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안장식’이 거행됐다.
9일 경기도 파주 동화경모공원에서 ‘고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안장식’이 거행됐다.

안장식이 끝난 식장에서는 팝그룹 ‘코리아나’의 ‘손에 손 잡고’가 장례음악으로 편곡돼 연주됐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주제가였던 노래다. 이 노래는 2년 후 또 다시 세계스포츠무대에 등장한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개막식에서 세계의 5대륙을 소개할 때 아시아의 배경음악으로 ‘손에 손 잡고’가 스타디움의 관중들, 그리고 TV위성중계로 지켜보던 한국국민들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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