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

만필자는 2015년에도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답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때는 정안군 이방원의 세력이 은밀히 모여 행군을 시작한 통인동에서 정도전이 살해당한 송현동까지의 이동시간도 함께 살펴봤었다.

이방원은 1398년 태조7년 음력 8월25일, 이날의 두 번째 출궁을 한 후 본저(本邸) 동구의 군영에서 십 여 명의 동지들과 만나 기병 10명, 보졸 9명, 그리고 각 장수들이 거느린 10여명의 노복들로 군세를 이뤘다. 무장상태가 매우 빈약했지만 이미 이때 그럭저럭 100여 명은 헤아릴 인원을 모았던 것이다.

당시 이방원의 본저가 있던 곳은 지금의 통인동으로 추정했다. 이곳에는 현재 세종대왕 탄신지 표지석이 있다. 이방원의 셋째 아들인 세종대왕은 무인정사 한해 전인 1397년 한성부 준수방(지금의 통인동)에서 탄생했다. 이곳에서 송현동에 이르는 경로는 경복궁의 좌측 담장을 끼고 돌아 광화문 앞을 지나게 된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이방원군 이동경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이방원군 이동경로.


이때 50세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던 만필자가 걸어서 이 거리를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27분이었다. 실록에 적혀 있는 이방원의 이동시간은 2~3시간이다. 30분도 못돼서 갈 거리를 한참 기세등등한 장정들이 두 시간 넘게 걸어갔다는 기록은 무슨 연유일까.

혹시 이방원의 출발지가 잘못됐거나 경로가 아주 다른 것인지를 살펴봐야 했다. 출발지가 통인동이 맞더라도 이처럼 대궐을 바짝 붙어서 반란군이 이동하는 것이 상식에 어긋나니 사직동을 크게 우회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초 추정한 이동경로가 크게 틀리지 않았음이 세종20년의 실록에서 확인됐다. 이날 일을 증언한 태종 이방원의 측근 전흥은 이날 초경이 다하는 밤9시 무렵 이방원이 10여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광화문을 지나가는 것을 봤다. 송현동에서 정도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이다. 본저에 모인 병력가운데 기병들만의 작은 무리를 이방원이 직접 이끌었고 다른 인원들도 의심을 사지 않을 규모로 나눠서 이동한 것으로 풀이된다.

광화문 앞의 기병이동이 의심을 사지 않은 것은 당시 왕자들이 순번을 정해 시내를 순찰하고 있었던 때문으로 보인다. 전흥의 증언에 따르면 이방원은 이날 궐을 빠져나오기 전에도 감순(순찰)의 일을 수행했다.

100여 명의 무리가 눈에 띄지 않게 작은 무리로 나눠서 이동을 하다 보니 공격개시 지점까지 모이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이다.

최초 군사행동이 송현 정도전의 집에 대한 공격이었지만, 무인정사를 기록한 태조 7년 8월26일의 기사는 진행순서에서 오해의 소지를 남기고 있다. 광화문 앞에 모인 반군을 보고 궐내의 세자측 인사들이 당황하는 언급을 먼저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날의 기사 역시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송현동 남은의 집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면서 대궐 숙위장수 박위가 반란이 난 것을 알아차리고 경보를 발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태조7년 기사는 이방원의 빈약한 군세를 의도적으로 모반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으로 강조하기 위해 뒤에 벌어진 일을 다소 앞당겨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도 절대 열세인 반군이 거사에서 성공하려면 정부군의 수뇌부인 정도전부터 제거해 막강한 정부군의 통제를 무너뜨려야 희망을 걸 수 있는 것이지, 빈약한 군세를 대번에 노출해서는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도전은 송현동 남은의 첩 집에서 측근들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반군의 기습을 받았다. 세자의 장인 심효생과 이근, 장지화가 그 자리에서 살해됐으나 정도전은 일단 담장을 넘어 이웃집으로 도망가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집주인인 전 판사 민부가 이방원에게 “배가 불룩한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왔습니다”라고 고했다.

이 말만 듣고도 정도전임을 알아챈 이방원은 이날 척후의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소근 등 네 사람에게 정도전 체포를 명했다. 소근의 호통에 정도전이 작은 칼을 쥔 채로 숨어있던 침실 밖으로 나와 투항했다.

붙잡힌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한 말은 “공이 예전에도 나를 살렸으니 이번에도 살려주시오”였다. 이는 6년 전 이방원이 개경 선죽교에서 포은 정몽주를 살해한 것을 말한다. 1392년 이성계가 잠시 개경을 비운 사이 정몽주가 다급하게 정도전 일당을 귀양 보냈었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그 같은 기세를 밀어붙여 귀양 간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것을 염려해 선수를 쳐서 정몽주를 죽였다. 이로 인해 정도전이 죽음에서 벗어난 것을 지금 이방원 앞에서 다시 꺼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었다. 이날의 거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도전처형으로 결론이 맞춰져 있었다. 군심은 정도전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지만 장수들은 임금의 총애가 가득한 그를 두려워했다. 이들이 확신을 갖고 이방원의 편에 서게 하려면 정도전을 죽인 사람이 자신임을 입증해야 했다. 당장 경복궁 안 최정예 갑사들을 이끌고 있는 숙위장수들과의 교전을 피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

이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고 꾸짖고 그를 즉시 참했다. 즉각 처형의 이유는 이방원의 정도전에 대한 분노가 그만큼 컸다기보다는 거사를 일으킨 그의 상황이 매우 다급했다는데 있다.

광화문앞 거리. /사진=구글지도.
광화문앞 거리. /사진=구글지도.


정도전의 말투에서는 이방원보다 더한 거물이 거사의 배후에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정도전 입장에서 가장 경계해야 했을 인물은 이방원의 둘째형 영안군 이방과다. 전회에서 언급했듯, 정도전이 이 무렵 연일 송현동에서 숙식을 한 이유는 임금 승하 때 시각을 다퉈 입궐하기 위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부왕의 쾌차를 위해 이방과가 기도를 올리고 있는 곳이 경복궁 동문 바로 앞의 소격전이었다. 8월25일 밤, 정도전과 이방과 두 사람은 마치 앞 다퉈 입궐할 준비를 갖추는 듯한 위치에 있었다.

조선의 유교통치원칙 가운데 하나인 적장계승에 비춰볼 때, 왕의 아들 가운데 살아있는 최연장자 이방과는 방석의 세자자리가 부당함을 입증하는 산증인이었다. 거기다 그는 태조의 무수한 출정에 종군한 유일한 아들로 상당한 군심의 기반도 갖고 있었다. 반란을 일으킬 인물로 정도전이 제일 먼저 의심할 사람은 당연히 이방과였다.

정도전과 남은이 밤새 웃으며 얘기 나누는 모습을 염탐할 정도로 정도전은 이날 밤 완전히 경계의 끈을 놓고 있었다. 이방원의 10여명 기병무리가 한밤중에 광화문 앞을 지나가도 한양 장안은 태평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주의할 인물 이방과가 소격전에서 기도에 몰두해 있는 한, 그의 막내 동생 이방원이 무슨 짓을 하든 정도전은 걱정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동생의 거사에 이렇게 이방과는 의도했든 안했든 막대한 정보교란의 도움을 줬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천지가 뒤집히는 소리와 함께 삽시간에 정도전은 이방원 앞에 사로잡힌 몸이 됐다. 예전 선죽교에서 정몽주 살인자의 오명을 무릅쓰며 자신을 구해주던 방원의 우정을 이번에는 형님 이방과에게 써 줄 것을 요청했다. 이날 밤 자신의 죽음을 총지휘하는 사람이 예전에 자신을 위해 정몽주를 죽였던 바로 이 사람인 것을 알아채기에는 모든 일들이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졌다. 이방원에게는 누구 때문에 죽는가를 알게 해줄 만큼의 배려를 할 여유도 전혀 없었다. 조선 팔도 곳곳에 포진한 30만 상비군이 언제 어디서 갑자기 진압에 나설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정도전이 죽음에 임해 소회를 시로 남기는 대서사시 같은 장면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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