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삼봉 정도전의 사후에 후손들이 편찬한 문집이 삼봉집이다. 이 책의 뒷부분에 자조(自嘲)라는 시가 수록됐다.

시의 끝에 松亭一醉竟成空 이란 구절이 들어간다. ‘소나무 정자에서 취하니 그간 이룩한 것이 모두 공허하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앞의 송정(松亭)을 누군가 ‘소나무 정자’가 아니라 ‘송현방 정자’라고 번역했다. 정도전이 무인정사의 날, 송현방에서 최후를 맞으면서 지은 시인 것처럼 해석을 한 것이다.

이 시를 지은 시점도 1398년의 무인정사보다 한참 전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오역은 번역한 사람의 문인적 충동이 빚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 충동이 조선 팔도 곳곳에 세워진 ‘송정’을 ‘송현 정자’로 바꿔버렸다.

역사의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진 것은 피가 튀고 고함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인데 문인들은 이것을 오페라 아리아 같은 극적인 장면으로 각색하기를 좋아한다.

2017년 중국드라마 ‘대군사 사마의’는 국내에서도 사극 팬들에게 제법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이 가장 열광한 것은 조조가 수많은 신하와 장병들 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다 최후를 맞는 장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조와 같은 무소불위 권력자의 죽음은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다뤄지는 것이 철칙이다. 수천, 수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최후를 공개하는 건 실제 역사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사학이 아닌 문예의 영역이다. 문인의 기질을 앞세워 얼마든지 장면을 멋있게 각색할 수 있다. 시청자들은 이런 연출에 환호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히 사실과 어긋난다. 역사적 사실을 재구성하는 일은 그런 문인기질을 앞세우면 안 되는 것이다.

삼봉 정도전 표준 영정. /사진=구글, ‘600년 경기도’
삼봉 정도전 표준 영정. /사진=구글, ‘600년 경기도’


정도전이 이방원의 기습을 받고 옆집으로 피했다가 끝내 붙잡혀 나오고 처형되는 과정은 절대로 시 한 수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도전이 시를 짓고 싶어도 그를 붙잡은 이방원에게는 그럴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이방원은 시간을 다퉈서 ‘내가 정도전을 죽였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대궐 안팎에서 이날 사태의 귀추를 지켜보고 있는 수비 장수들 설득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건이었다.

장수들은 이미 마음으로는 이방원의 편에 서 있었다. 정도전이 갈수록 정권 말기증상을 보이며 이들에게 태형 50대의 처벌이란 굴욕도 안겼다. 왕족, 공신의 경우엔 그 매를 휘하가 대신 맞았다.

그러나 정도전에게 맞서기엔 분노만으로는 부족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장수들은 이방원에게 ‘그럼 정도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이시오’라고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입증해야 살아있는 왕자들 가운데 적장의 서열 4위인 이방원에게 천하가 주어질 일이었다. 입증이 늦어지면 장수들은 시치미를 떼고 진압군으로 돌아서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었다.

사정이 이런데 이방원이 무슨 시 한수를 들어줄 틈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정도전은 잡힌 즉시 처형됐다.

1398년 8월25일 밤, 정안군 이방원은 정도전을 기습해 살해한 후 송현방 동구에서 거병을 선포했다.
1398년 8월25일 밤, 정안군 이방원은 정도전을 기습해 살해한 후 송현방 동구에서 거병을 선포했다.


드라마 속의 영웅적인 정도전 이미지를 지키려는 사람들은 그의 최후를 언급한 실록도 마음에 안 드는 듯하다.

실록은 잡혀 나온 정도전이 “한마디 말을 하고 죽겠다”고 하자 이방원의 수하 소근이 말을 탄 이방원 앞으로 끌고 갔다.

정도전이 “예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라고 청했다. 이는 1392년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임으로써 정도전을 죽을 위기에서 구해낸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었는데도 도리어 부족하게 여기느냐? 어떻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느냐”고 꾸짖고 참하라는 명을 내렸다.

정도전을 존경하는 사람들은 이 기록이 그를 비굴하게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드라마에서 영웅들의 “죽일 테면 죽이라”고 당당하게 소리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창작물 속에서의 판에 박힌 ‘클리셰’일 뿐이다. 목숨을 걸고 거사를 일으킨 영웅들도 최후의 순간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영웅이라고 죽음이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들이 더욱 영웅인 것이다.

불과 몇 분 안에 벌어진 습격은 아무리 두뇌가 뛰어난 정도전이라해도 모든 상황을 파악하기엔 절대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의 말 속에는 1392년 이방원의 뒤에 이성계가 있었듯, 지금도 이방원이 더 큰 인물의 지시를 받고 나타난 것으로 판단한 흔적이 보인다. 아마도 이날 거사의 최고 지휘자를 영안군 이방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권의 실질적 총수인 정도전으로서 한 번 싸움에 붙잡혔다 해서 바로 모든 것을 체념할 일도 아니었다. 상황을 파악해서 살아남아 반격이 가능하면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도전을 하는 것이 세자의 후견인으로서 더 책임 있는 태도였다. 정도전은 최후의 순간에 체념보다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이방원 편에 서서 실제상황을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이 기록된 태조실록은 태종대에 편찬됐으니 이방원을 두둔하기 위한 첨삭이 있었을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무턱대고 실록의 기록이 틀렸다고 한다면, 그런 주장은 또 무슨 근거로 믿을 수 있을까.

6하원칙에 따른 당대 기록이 가장 잘 담겨있는 건 역시 실록이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최고의 정보다. ‘승자의 입장’에 따른 왜곡을 가려내려면, 실록의 여러 기록들이 앞뒤가 안 맞는 것을 가려내서 나머지를 취하는 것이 사실에 가장 가까이 가는 방법이다.

1398년 음력 8월25일 밤, 이방원의 정도전 기습은 대성공이었다. 정부군이 나타나기도 전에 정도전을 붙잡음으로써 이날 거사의 팔부능선을 넘었다.

이미 대궐의 도진무 박위가 송현동의 전투를 대궐 안에서 목격하고 비상사태를 발동하며 진압조치에 착수했다. 더 이상 은밀한 군사행동은 의미가 없으므로 지금의 안국동 사거리로 추정되는 송현방 동구에서 거병을 선포했다. 정안군 이방원의 반군은 송현방에서 광화문 앞으로 진군했다.

구부능선을 넘어가는 것은 세자 방석을 자리에서 몰아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광화문 진영에서는 호출을 받고 달려 나온 수많은 사람들의 생사가 엇갈리는 살생극이 펼쳐졌다.

저작권자 © 만필나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