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기사의 닳고닳은 논리로 논할 자리 아니다

한국은행. /사진=구글맵.
한국은행. /사진=구글맵.

별 이상한 사람들까지 다 한국은행 총재 인선에 말참견을 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를 이 자리에 앉히고 싶어서 그러는건가.

한국은행 금통위 정도 주워들은 지식으로 한은 전문가를 자처하는 당신. 지금 이 자리가 임기 4년의 장관급 자리라는 것만 알고 누구한테 인심 쓰고 싶어서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중앙은행의 수장자리는 그런 나눠먹기로 정할 자리가 아니다.

한국은행 총재란, 비유하자면 전 국민이 운전을 배우러 시내연수 나갔을 때 사이드브레이크만 쥐고 앉아있는 운전강사와 같다. 시내연수 강사는 운전학원의 교육용 차량 강사와 또 다른 매우 경험 많고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행의 정책오판은 당장은 표시도 안 난다. 일일이 찾아 고칠 수도 없는 곳에 폐단이 쌓여 3년, 5년 후에 봇물 터지듯 대란을 일으키는 것이 중앙은행 정책의 속성이다. 다음 정권에 덤터기 씌우기는 통화정책만한 것이 없다.

예전에도 한은 총재를 새로 뽑을 때가 되면 이상한 사람들까지 꽤나 자기 프로필을 팔고 다녔다. 심지어 재무부처 수장을 지내서 절대로 한은을 넘보면 안되는 사람까지 꽤나 이 자리를 넘봤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를 겪었던 나라가 20여년 만에 G8을 논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데는 1998년 이후 한국은행 총재 인사만큼은 정권을 떠나 올바른 원칙이 확립된 것 또한 큰 역할을 한 것이다.

‘IMF 위기’의 와중에 한은 총재의 신화를 남긴 고 솔뫼 전철환 총재의 헌신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후로 한은 총재에 대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다.

그 어떤 총재도 정권 입맛을 기준으로 선임된 사람도 없고, 스스로를 정권의 사람으로 자처한 이도 없다. 김대중 정부에서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정부에 이를 때까지 자기 사람을 한은 총재로 보낸 정권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혹자는 이명박 정부의 김중수 총재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 전철환 총재의 후임자 가운데 특히 김중수 총재에 대해 만필자는 나름의 경의를 갖추고자 한다. 한은 내에서는 상당히 인기 없는 총재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직원들 대화방을 들여다봤다는 등의 시비에 대해 변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김 총재가 당초 총재에 선임될 때 이른바 MB맨이라는 시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그와 함께 하마평에 오른 전직 재무관료에 비해서는 몇 갑절 더 자격을 갖췄던 인물이다.

당시 정권이 중앙은행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를 지켜서 전직 관료 아닌 김 총재를 선임했는데, 김 총재 4년 기적 아닌 기적이 벌어졌다. 이 때 정권은 철지난 747 성장론 속에 70년대 토목경제 환상에 빠져 있었지만 김 총재가 ‘금리 정상화’라는 매우 쓴 약 처방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원칙에 입각해 선임된 총재라면 최소한 이와 같은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만약 이번 한국은행 총재 선임으로 듣지 말아야 될 억지가 넘쳐난다면 문재인 대통령은 차라리 이주열 현 총재의 3연임을 심각하게 고려해 볼 것을 추천한다. 아주 아름다운 인선이 결코 아니지만 잡설이 난무하는 토양을 일소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만필자는 2018년 문 대통령의 이주열 총재 연임 조치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에서 선임된 그가 2016년 정권의 발권력 동원 압력에 무너진 것에 너무나 실망했기 때문이다.

야당일 때 이 총재를 맹렬히 비난하던 민주당이 그에게 연임의 영광까지 준 것은 집권하고 보니 대들지 않는 총재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된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가졌다.

그러나 정부와 중앙은행의 갈등이란, 열이면 열, 금리 낮추라는 정부 요구를 중앙은행이 거부할 때 벌어진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에는 부동산 과열 단속을 위한 금리인상 요구까지 나왔으니 한은이 정부와 갈등을 가질 일이 별로 없었다.

이 총재 연임 또한 관점에 따라 긍정적 면도 있다.

미국에서는 정권이 교체됐을 때 전 정권이 임명한 연방준비(Fed) 이사회 총재를 일단 한 번 연임시키는 관행이 있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사람을 문재인 정부가 연임시킨 것이 이와 같다. Fed에 대해 몇 십 년 유지되던 전통인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깨졌다.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1987년 임명한 앨런 그린스펀 Fed 의장은 민주당의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도 연임이 돼 1990년대 미국경제 호황을 이끌었다.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임명한 벤 버냉키 의장도 2010년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연임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이 버냉키 후임으로 임명한 재닛 옐런 의장(현 재무장관)에 대해 대통령선거 때부터 “훌륭한 사람이지만 민주당원이라서 바꾸겠다”고 공언을 했다.

막상 대통령이 되고보니 트럼프 대통령은 옐런 의장의 정책에 대단한 호감을 갖게 됐다. 그는 본인이 직접 최종 후보 3인에 옐런 의장을 포함시키며 고심을 거듭했다. 하지만 최종 결정은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제롬 파월 현 의장에게 갔다.

옐런 의장은 마지막 순간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트럼프에게 답례하듯, Fed 의장뿐만 아니라 Fed 이사직에서도 함께 물러나 새로운 집행부에게 일체 부담을 남기지 않았다. 한 때는 6년 더 남은 이사 임기는 채울 것이란 기세를 내보이던 옐런이었다.

정작 트럼프와 Fed의 갈등은 옐런 의장이 떠난 뒤에 터졌다. 금리인상을 이어가는 파월 의장으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이 “Fed가 미쳐가고 있다”는 폭언까지 터뜨렸다. 파월 의장을 해임하는 방법, 이사로 강등하는 방법 등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외신에 보도됐다.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의 재임 중 모습.
고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의 재임 중 모습.

한국은행 총재란, 정권에게는 예방주사와도 같은 존재다. 경제정책에 거품이 생겨서 질환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한은이다. 한은 총재가 방어벽을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면 재무, 산업부처의 수장들은 이를 믿고 마음껏 성장의 아이디어를 개발할 수 있다.

한은총재를 이른바 ‘서별관 회의’로 불러들여 ‘내편의 사람’인 것처럼 여긴 정권치고 말로가 좋은 곳이 없다. 한은 총재를 장관자리의 하나로 여기고 탐을 내서 쓸데없는 일까지 불려 다니는 거 좋아한 사람치고 오늘날 제대로 존경받는 사람도 없다.

정권의 이양기에 임기가 끝나는 인선이니 물러나는 대통령과 새로 취임하는 대통령이 건전한 협의로 인선하는 전통을 이참에 확립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할 것이다. 이 자리는 그 어느 정권도 정치적 목적이나 보은용으로 사람을 앉힌 적이 없는 전통이 확립됐다는 점만 명심하면 된다.

고 전철환 총재의 후임자라는 점만 명심하면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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